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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ion (1)
위에서 말한 [만문로당]의 원곡은, 1931년에 베이징의 고궁박물원구내각대고의 안에서 발견되었다. 이 자료를 [만문원당]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문원당]은 17세기전반에 만주어(일부 몽골어)로 쓰여진 기록으로, 18세기, 건륭제 시대에 이 기록을 기반으로 [만문로당]이 작성되었다. 따라서, 사료의 엄밀히 하기 위하자면, 이 [만문원당]을 대조할 필요가 있다. 이 자료는 현재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있고, 동원부터 1969년에 [구만주당]과 표제되어 영인(사진판)으로 출판되고있다(간다 노부오[1979]). 또 [청태종실록] 편찬과 깊이 관계 있는 연대기 [내국사원당]도 유용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간다 노부오[2003]). 및, 청초기의 여러 사료에 대해서는, 카토 나오토[1993]의 해설을 참조할 것.
 돌아와서, 누르하치 시대, 그 후 청조의 근간이 되는 사회, 군사제도가 창시되었다. 팔기제도이다. 팔기제도는 그 형태를 변화시키면서 민국까지 존속했다. 청나라대의 팔기제도 및 그것에 따르는 여러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연구가 나오고 있지만, 전체를 보기에는 호소야 요시오의 연구[1968]가 좋다. 최근, 학계에서는 일종의 [팔기제도연구열]이 되는 것이 있고, 청조의 국가구조을 팔기제도부터 밝히려고하는 움직임이 있다. 중국에서는 두지아하오[1998] 혹은 리우시아오멍[1995]가 그 대표이고, 우리 나라에서는, 호소야를 비롯해 야나기사와 아키라[2001], 쿠스노키 요시미치[1999a][2001], 스기야마 키요히코[1998][2001a][2001b], 스즈키 마코토[2001], 와타누키 테츠로[2002][2003]의 연구가 주목받고 있다. 스기야마[2001c]는, 청조의 팔기제도에 대해 "팔기제하의 기본적인 지배관계는, 분봉된 황실 여러왕(기왕)이, 각 기인이 영유하지 않고 관할하는 니루를 분여된 주종제적으로 지배하는 측면, 즉 분봉제와 니루제의 결합인 측면으로 존재했다(기왕제). 그리고 걸쳐진 지배관계 하에서 구성된 각기, 각기왕가는 기를 다위로써 권리, 의무를 균일하게 나눔과 동시에(할분체제), 좌우각사기로 나뉘어져 의례, 출정시의 배치가 정해져있었다(좌우익제). 이러한 기왕제라고하는 수직구조와 팔분체제, 좌우익제라고하는 수평구조가, 팔기제를 관통하는 기본구조이다"라고 논한다. 팔기의 구조를 고려하는데 있어서의 기본적인 정의로써 평가하고 싶다. 단, 최근 타니이 요코는 이것들의 연구경향을 비판하고 "팔기의 조직도 인원도, 오히려 한의 하에서 집중관리된 경향인 것이었다"(타니이[2005])라고 말한다. 팔기의 구조에 대해서 강무, 옹정 시대의 개혁기를 중심으로 검토한 것이 호소야[1983]과 스즈키[2001]이다. 특히 호소야는, 옹정제의 팔기개혁에 주목하여, 니루의 명칭변경문제를 중심으로 검토를 더하고, 스즈키는 강무, 옹정시대의 기왕권력에 대해 원사료를 기반으로 상세한 고찰을 했다.
 1644년, 청조가 들어섰더니, 그에 따라 수많은 기인이 베이징 및 그 주변지로 이주했다. 동북에 남은 기인과 경기(왕이 사는 가까운 지역)으로 이주한 기인의 선별이 어떤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논문은 없지만, 경기지방의 기인에게 나누어진 [기지] 및 [영]에 대해서는 스도 요시유키[1944], 이시바시 히데오[1956], 호소야 요시오[1972] 등의 연구가 있다.
또한, 청조의 세력확대에 따라 시안, 광저우, 항저우, 푸저우 등, 각중요지점에 놓여진 [주방팔기]는, 청조의 지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해당 지역에 있는 한인과의 교류를 통해, 특수한 민족사회를 형성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크로스리(Crossley [1990][1997])과 엘리엇 (Elliott[2001])등 미국 연구자에 의한 연구가 눈에 띈다. 또 호소야등에 의한 현지조사에 의거한 연구성과(호소야[2003])도 이 [주방팔기] 문제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 또 몽골기인의 연구는, 그다지 번성하진 않았지만, 최근 건륭기의 몽골기인 [관료]에 대해서, 무라카미 노부아키[2002][2003]이 검토를 더하고 있다.
 명말부터 청초에 걸쳐서, 여진사회는 어떤 구조이었는가, 사회인류학적인 수법등을 사용하여 견실한 연구를 발표한 사람이 마스이 칸야다. 마스이의 연구[1993][1999a][1999b][2001]는 언뜻 보기에 수수하지만, 청초사회의 해명에 빠질 수 없는 성과를 견실히 내었으며, 최근 매우 주목받고 있다.
 최근의 청초팔기연구의 중심은 [한] [기왕] [혼인관계]를 키워드로써 청조의 권력구조를 구상하려고 하는 방향에 있다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대표적인 사람으로써, 쿠스노키 요시미치[1999b], 두지아하오[1998], 스기야마 키요히코[1998][2001a][2001b]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옹정제의 팔기개혁이후의 제도의 변화, 기인의 변용등에 대해서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호소야, 스즈키, 와타누키가 그 대표이다. 이것들의 새로운 팔기연구가, 앞으로의 청조사회연구의 주류가 될 것이다.

<2> 청조와 [외번]
 몽골은, 동투르키스탄의 코무루(하미)와 투루판의 이왕가, 티벳과 함께 [외번]이라고 호칭되었지만, 이 [외번]이라고 하는 개념은 일체 어떠한 것인지, 현재까지 명확한 답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청조는 이 세력확대 속에서 우선은 차하얼을, 그리고 17세기 후반에는 할하를 그 영향하에 지배하고, 이윽고 몽골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 지배원리가 된 것은 무엇이었을까. 타테오 나카미[2000]은 "유교문화를 공유하는 여러 조공국의 사이에서는 중화세계의 [황제]와 [국왕]과의 관계로 질서는 보였지만, 티벳 불교권인 몽골, 티벳에 대해서는, 황제의 존재는 문수보살의 분신으로써 해석되었다. 게다가 티벳과 청조황제와의 관계는, 불교교단과 시주와의 관계로 비하여지고, 또 몽골과의 관계는, 몽골왕공과 칭기즈칸에 유래한 황제권을 계승한 만주황제와의 주종관계로 엮이게 되었다."라고 한다. 나카미의 생각은 명쾌하다. 이 나카미의 견해에 더해, 예를 들어 동투르키스탄은 이 원리 속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또 이것은 어디까지나 청조황제측의 논리인가, 이 논리는 결국 대상이 되는 일반대중의 어떤 수준까지 관철할 수 있었던가 등등의 문제도 밝혀야 할 것이다. 키시모토 미오[2000]는, "그 시점을 놓는 방식에 의해, 그려지는 청조국가상은 상당히 다를 것이라는 것도 예상된다."라고 말하며, 암암리에 그 시점의 차이는 근현대의 국가의 어떤 방식으로 영향도 미칠 것이라고 지적한다. 최근의 청조의 구조 및 지배원리에 관한 연구상황에 대해서는, 카타오카 카즈타다[1998]과 스기야마 키요히코[2001c]가 참조될 것이다.
名前の文字がみにくいんです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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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000002134090 · 5 years ago
  • subculture · 5 years ago
  • subculture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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